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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98년12월
    철창도 막지 못한 사랑

    수배와 감옥 넘나든 13년 연애 끝에
    마침내 결혼식 올리는 전 사노맹 중앙위원장 백태웅·전경희씨

    “아낌없이, 남김없이 사랑하는 일만 남았죠”

    지난 여름, 건국 50돌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백태웅씨와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해왔던 그의 약혼녀 전경희씨. 오는 12월 19일,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는 이들 예비 부부의 만남에서 결혼까지 사연을 공개한다.

    교도소 담벼락을 넘어서 시끌벅적한 바깥세상의 한복판에 두 발을 내디뎠다. 시간이 한없이 정지된 것만 같아 미세한 파장을 감지하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던 페쇄된 공간에 일곱해 동안이나 갇히고 났더니, 숨쉴 틈 없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오히려 숨통을 틔워준다. 누군가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져준다면 주저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럼요. 행복하죠.”

    지금은 해체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조직의 ‘수괴’였던 백태웅(37세·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사노맹 중앙위원장)씨.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혐의로 7년간 복역하고 지난 여름 건국 50돌 8·15 특사로 풀려났다.

    결혼을 앞두고 티격태격
    싸움도 하는 오래된 연인


    징역살이에 수배생활 6년까지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을 국가의 감시망 속에서 마음대로 운신하지 못하고 지내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한달 후면 지치고 힘들었던 시절을 줄곧 함께 버텨준 동갑내기 약혼녀 전경희(37세·전 사노맹 비서실장)씨와 때늦은 결혼식도 올린다.


    ◀ "혹이 하나 붙은 것 같다"는 말로 결혼 소감을 대신하는 전경희씨와 "여자들 목소리가 언제 이렇게 커졌어요"라며 장난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 백태웅씨. 두 사람의 앞날에 파안대소할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

    “사람들의 외모가 많이 변했더라구요. 표정도 그렇고. 특히 여자들 각선미가 너무 좋아졌던대요. 서울 시내 지리도 조금 달라진 것 같구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바뀌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나 생명력은 여전하더군요. 나한테도 아등바등 고군분투하는 일상에 합류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게 기쁘죠, 뭐.”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외따로 떨어져 7년을 살았으니 얼마간 혼돈을 겪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이따금 그로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맞춰가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집안의 기둥 뿌리가 흔들릴 만큼 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가는 결혼 문화만은 도무지 납득하지 못 하겠다는 눈치다.

    “옥바라지하는 동안은 태웅씨와 다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어요.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이 안(감옥)에 있었구나 절감하는 걸요. 일상처럼 굳어진 관습에 문화적인 충격을 종종 받더라구요. 결혼 문제만 해도 그래요. 아끼느라고 하는데도 혼수며 예식비용이며 돈이 솔찮게 들어가잖아요. 우리야 주위에서 수시로 목격하던 일이라 상품화된 결혼 문화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마는데 태웅씨는 아직 그게 낯선가 봐요.”

    4천~5천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갈비탕 한 그릇 대접하려고 세배 가까이 되는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살림살이를 이것저것 한꺼번에 장만해 가는 풍토도 이상하단다. 자기가 빨래를 해주겠다며 세탁기도 사지 말자고 은근히 조르는 남자.

    전경희씨는 인륜지대사를 앞두고 이따금 툭툭 이의를 제기하는 예비 신랑을 보면서 혹이 하나 붙은 것 같다며 살짝 눈을 흘긴다. 의견 충돌이 생기면 다투기도 하냐는 물음에 전경희씨가 하는 말.

    “힘으로 하면 내가 이겨요.”

    이름난 운동권 학생과
    출판사 여직원의 첫만남


    새신랑, 새색시라는 말이 멋쩍게 들리는 나이에 결혼식을 치르는 두 사람에게 좋아서 호들갑을 떤다거나 설렘을 주체 못할 정도로 기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진작 맺어졌어야 마땅한데, 약혼한 지 9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완벽한 결합을 이루게 됐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13년 만이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다 1년 만에 출감한 백씨가 번역일을 청탁받은 출판사에 들렀다 편집부에서 근무하던 전경희씨를 처음 만난 이후로. 첫 대면이었지만 전씨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백태웅이라는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학생운동권에서는 제법 이름이 났던데다 매스컴에도 간간이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정견이랄까, 사회를 보는 시각이 비슷했어요. 시대적인 상황이 그래서 아무래도 ‘운동’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눴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얘기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애 감정도 그런 분위기에 녹아 있었겠죠. 마침, 이 사람도 노동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구요. 마음도 통하고 뜻도 통해서 의기투합한 겁니다.”

     연애에 ‘의기투합’이라는 살벌한 단어를 끌어다 붙이다니…. 전경희씨의 첫인상을 물었더니 뜬금없이 ‘의기투합’ 운운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동지적인 신뢰도 좋고 운동도 좋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애를 하는데 어떻게 명분만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줄 수 있냐고 되물어도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경상도 남자들이 원래 표현에 인색하잖아요”라는 짤막한 변명이 전부다. 옆에서 보기가 우스웠던지, 전씨가 이야기를 거들었다.

    “우리 둘다 속내를 내보이는 데 서툴긴 하지만 그나마 내가 말하는 편이 낫겠네요. 나는 눈이 맞았다고 말하는데도 이 사람은 지금도 계속 아니래요. 86년이었으니까 스물다섯이었죠. 이름만 듣다가 출판사에서 처음 봤는데 인상이 참 맑더라구요. 느낌이 좋은 남자였어요. 학번도 같고 경험도 비슷해서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겨울이었나 보다. 눈쌓인 보도를 지나가는데 전경희씨가 지나가기만 할라치면 맞은편에서 멀쩡하게 걸어오던 백태웅씨가 자꾸 미끄러지더란다. 한두번이면 실수겠거니 넘어갔겠지만 횟수가 잦아지자 조금씩 의심스러워졌다. 환심을 사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지.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경희씨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정말 땅만 얼면 걷다가 넘어지는 사람이었다. 지레 오해를 해버린 것이다. 속으로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머잖아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자주 만났어요. 시절이 험악해서 연애다운 연애는 못 했죠. 만나던 첫해에 태웅씨가 수배를 당하는 바람에 항상 남의 눈을 피해서 만날 수밖에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맘놓고 만날 수 없게 만들었던 외부적인 상황이 우리 두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지 않았나 싶어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출판사를 그만둔 전경희씨는 백씨와 함께 ‘노해동(노동자해방투쟁동맹)’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았다. 연인이자 동지로서 동고동락하기 시작한 출발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렇게 지내기를 3년. 둘은 89년,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을 불러모아 조촐한 약혼식을 가졌다.

    “수배가 잠깐 풀렸을 때였어요. 마음의 약속도 해두고 양가 어른들께 정식으로 인사도 드릴 겸해서 자리를 마련했죠. 장인·장모께서 저를 굉장히 좋아하세요. 딸을 가진 여느 부모들이었으면 틀림없이 반대를 했을텐데, 그분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시더군요. 제가 나쁜 사람 같진 않았나 봐요. 당신 딸을 워낙 믿기도 하셨겠지만. 명절이나 무슨 때만 되면 정성스레 장만한 음식을 싸서 보내주셨어요.”

    남들처럼 졸업 후에 직장에 취직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결혼했다면 지금쯤 학부모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회변혁을 꿈꾸던 그들이 평범한 가정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사노맹 핵심 멤버로 활동하던 두 사람이 1992년 4월 29일, 한날 한시에 철창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은 원주교도소로, 다른 한 사람은 청주여자교도소로. 백태웅씨는 당시에 사노맹 중앙위원장, 전경희씨는 비서실장이었다.

    “저는 결심에서 징역 15년형을 받았고 이 사람은 3년형을 받았죠. 처음엔 편지 교환도 안 되더라구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 소통할 수단을 마련해 달라고 법무부에 청원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허락이 되더군요. 그때부터 편지로 서로의 생활과 생각, 느낌들을 시시콜콜 주고 받았죠.”

    수배와 구속으로 점철된 사랑
    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였다


    7년 동안 오고간 편지는 모두 5백여통. 물리적인 거리로 따지면 한참이지만 마음은 지척에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도 이들에겐 예외였다. 게다가 전경희씨가 형량을 채우고 출소한 후에는 한달에 평균 세번씩 원주까지 면회를 다녀서 한시도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누가 누구를 기다린다는 따위의 표현도 적절치 못하다.

    “생각해보세요.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대화를 제대로 못 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양반이죠. 요즘 무슨 고민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거든요. 둘이서 농담삼아 주말부부라고 그래요. 서로 처해 있는 조건은 달랐지만 노상 태웅씨와 함께 지내는 기분으로 살았어요.”

    전경희씨는 출소 후에 사노맹 관련 구속자들의 가족 모임인 ‘민들레’의 회장직을 맡아 구속자 석방운동과 옥바라지에 전념했다. 잠깐 동안 학원 강사를 해보기도 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뤄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일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시 바삐 꺼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태웅씨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엔 면회도 오지 말라고 했어요. 가능하면 내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유학가서 공부를 하거나 자기 삶을 개발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진심이었어요. 막말로 운이 없으면 15년을 꼬박 채우고 나와야 할 판인데, 언제 나올지 기약없는 사람 뒤치다꺼리 하느라 늙어가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헌데, 말을 듣지 않데요.”

    교도소의 하루는 아주 더디게 흘러간다. 가끔씩은 시간이 방안에 고여 있는 물처럼 느껴진다. 너무 느리고 더뎌서 숨이 막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그리움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힘이 남아 돌아 기운이 펄펄 넘치는데도 쓸 데가 없어 애꿎은 주먹만 쥐락펴락 반복하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상. 혈기방장한 젊은 남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정해진 일과는 아침 6시 30분 기상, 하루 1시간 운동, 식사 시간 정도이고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 보냅니다.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요. 저는 주로 공부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죠. 지난 일들, 과거의 신념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반성도 하구요.”

    사고의 폭을 넓혀볼 요량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음악, 미술, 문화, 역사 등등.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용한 시간이었다. 그곳이 아니면 접하지 못했을 새로운 사회를 경험한 것도 뜻깊었다. 강도, 살인, 강간, 절도, 유괴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로 들어온 ‘밑바닥’ 인생들의 애환을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는 기회였다.

    “열살 때 가출해 서울역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마약사범으로 구속돼 징역을 살던 친구가 기억에 남습니다. 저보다 먼저 출소하면서, 손씻고 산으로 난이나 찾으러 다녀야겠다고 하더군요. 얼마 후에 편지가 왔어요. 내 꿈을 꾸고 난 다음 날 난을 발견했다며 고맙다는 내용이었죠. 그 친구도 환경이 불우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자랐을 겁니다. 문제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사회 구조겠죠.”

    이제 다시는 떨어져 살아야 하는
    불행이 찾아오지 않기를


    서울에서 원주까지 넉넉잡아 두 시간. 전경희씨는 거의 매주 원주교도소로 약혼자를 찾아갔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허탈할지 알지만 얼굴을 보고 와야 마음이 놓였다. 깐깐한 교도관을 만나 면회실 아크릴 유리문 안쪽과 바깥에서 무슨 정상회담이라도 하듯이 긴장한 채 마주 앉게 되더라도 말이다.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다 하고 오는 경우는 드물어요. 교도관 입회 하에 면회를 하기 때문에 목까지 차올랐던 얘기도 그냥 안으로 삼키고 말죠. 뒤끝 없이 개운했던 면회는 손에 꼽을 정도예요. 감정 소통도 중요하지만 면회실 주변 여건도 한몫하거든요. 담당 교도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면회의 질이 달라지기도 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양심수 석방 문제가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도 3·1절 특사에 사노맹 관련 구속자들이 풀려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사면 대상자 발표가 있기 전날, 전씨는 컴퓨터 통신에서 기사를 검색하다 백태웅씨의 이름이 빠졌다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원주로 달려갔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더라구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사람한테 찬물을 끼얹는 꼴이잖아요. 면회실에서 이리저리 말머리를 돌리다 이번에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실망이 얼마나 컸겠어요. 8·15 사면 때는 준법서약서 파문으로 진을 쏙 빼놓고, 아무튼 나오는 순간까지 고생이었어요.”

    바깥 세상으로 나온 지 넉달째 접어든다. 수배다 징역이다 해서 1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친구, 선·후배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일주일 스케줄이 빽빽하다. 틈틈이 대학에 강연도 나가고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려고 운전학원에도 다닌다. 거기다 결혼 준비까지. 출소하던 날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전씨와 영화 한편 관람할 시간도 내지 못했다. 그저, 잘 해줘야겠다는 마음뿐이라고.

    “공백기간이 길어서 당분간은 적응 기간으로 삼을까 해요. 현실감각을 회복할 때까지는 공식적인 일도 맡지 않고 정치적인 발언도 삼가려고 합니다. 선배나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조언도 구하고, 기회만 된다면 외국 유학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어디서든 ‘백태웅의 약혼녀’라고 소개되는 전경희씨도 이제는 누구의 약혼녀나 아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을 내걸 만한 일을 찾아볼 생각이다.

    대림동에 새로 지은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서 신접 살림을 꾸려갈 백태웅·전경희씨. 평탄하지 않았던 지난 세월을 동지이자 연인으로 꿋꿋하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사랑과 일 그리고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로 영원히 서로를 지켜주리라 다짐해 본다